전주 한옥마을 진로 캠프
한옥마을 테마식 진로체험활동은
중학교 자유학기제에 따른 교육과정의 체험활동 및 초등학교 진로체험활동을 전주 한옥마을, 주변 명소 견학과 더불어 체험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쾌적한 숙소 제공 및 한옥마을 및 주변 명소를 견학과 더불어 진로체험활동을 연계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옥마을테마진로체험 안내 문의 :
063-228-5203 (010-5879-5204) 드림진로교육센터
# 숙소 안내
전주한옥마을 게스트 하우스 또는 근교 유스호스텔 / 호텔
숙박비용 : 1인당 : 15,000원(게스트하우스/유스텔- 주중기준) ,
한옥게스트하우스 1인당 17,000원 / 호텔 1인 22,000원
1인당 식비 : 8,000원 / 선택사항- 석식 10,000(갈비)
한옥게스트하우스및 식당
주변 관광지( 전주동물원 및 덕진공원)
# 진로체험활동: 약 64종의 체험활동 실시( 각 체험처 이동)
한옥마을 캠프 활동사진
# 한옥마을 주변 관광 견학지
1. 전주 전동성당
현재 전주시 안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호남 전체에서 최초로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 이다. 1937년에서 1957년까지 천주교 전주교구의 대성당이었으며, 건축물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영화의 촬영지나 결혼식 장소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 본당의 수호 성인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다.
원래 전동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풍남문의 밖으로 1791년 신해박해 때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1759-1791)을 비롯하여 그의 외종형 권상연 야고보(1751-1791)이,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 유관검 (1768-1801) 형제가 육시형을, 윤지헌 프란치스코 (1764-1801), 김유산 토마스(1760-1801), 이우집 (1761-1801)등이 교수형을 당한 등 호남 지역의 많은 가톨릭 신자가 순교한 자리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이 허용되면서 개항지가 아니었던 전주시에도 선교사가 들어왔으며, 1891년에는 전주성당 (현재의 전동성당) 주임인 보두네 신부가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민가를 사들여 임시 본당으로 삼았다.
본당이 처음 생겼을 때에 전주읍성 주변에 신자는 거의 없었고, 주로 산골인 대승리, 고산 되재, 천호동, 배재 등지에 신자가 밀집해 있었으나,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는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나면서 신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후 1908년 명동성당의 내부를 건축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성당이 착공되었다. 성당은 1914년에 비로소 외관 공사가 끝났으며, 이후로도 계속 공사가 진행되어 1931년에 완공되었고, 그 해 6월 18일에 대구대목구의 드망즈 교구장을 주례로 하여 축성식을 가졌다.
1937년에는 대구대목구에서 전주지목구가 분리되면서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되었으며, 첫 교구장인 김양홍 신부가 착좌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주교좌 성당으로의 역할을 하다가 1957년 중앙성당으로 주교좌가 옮겨감으로써 다시 평범한 성당으로 돌아왔으나, 이후로도 계속 전주 지역의 기독교 성지 중 하나로써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981년 9월 25일에 사적 제 288호로 지정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시위가 성당에서 몇 차례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주임 신부 및 보좌신부가 경찰의 폭력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1988년에는 원인 불명의 화재가 일어나 성당의 일부가 전소되는 등의 일도 겪었다.
2009년에는 대한민국의 일부 기독교 교회가 사회 봉사보다는 외연적 성장에 치중하는 것에 분노한 20대 청년 2명이 건물 정문에 반기독교적 낙서를 하였다가 붙잡혔다.
전동성당은 호남 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 이며,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성당 내부의 석조 기둥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하여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주춧돌인 화강암은 착공 당시인 1908년에 대한제국을 간접 통치하고 있던 일본 제국 통감부가 헐은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 돌을 이용하였다. 성당을 구성하는 벽돌의 일부도 헐린 성벽에서 나온 흙을 구워 만들었다. 나머지 석재와 목재들은 각각 익산시 황등면의 채석장과 승암산의 목재를 사용하였다. 1908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1년에 최종 완공되었다.
함께 있는 전동성당 사제관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전주 경기전
사적 제339호. 지정면적 4만 9,527.4㎡. 1410년(태종 10)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완산·계림·평양 등 세 곳에 창건하여 부왕인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셨다.
1442년(세종 24)에는 그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종전이라 불렀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하였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 본전 가운데에서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옆 익랑(翼廊)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多包式)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 안의 세번째 기둥렬[柱列]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본전 앞에 내단 헌은 본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二翼工式)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다. 또한, 본전 양 옆에는 익랑(翼廊: 문의 좌우편에 잇대어 지은 행랑) 2칸, 무(廡: 전각 주위에 세운 행랑) 4칸이 있다.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랑 2칸을 두었다.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다. 현재 이곳에 있는 태조 어진은 1442년에 그린 것을 1872년(고종 9)에 고쳐 그린 것이다. 경기전은 그 주변 일대와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된 외에 경기전 정전은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어 있다.
3. 전주 오목대
오목대 (梧木臺)
전라북도 기념물 제 16호
전라북도 전주시의 완산구 풍남동에 위치한 작은 언덕이다.
경기전에서 약 동남쪽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언덕의 정상은 평평하고, 그 아래에는 전주천, 한옥 마을, 한벽루(寒碧樓), 전통문화센터 등이 있다.
정상은 1380년(고려 우왕 6)에 남원의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던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장군이 이곳에서 승전 잔치를 베푼 곳이다.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나서 여기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오목대(梧木臺)라 했다.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기에 언덕의 이름을 오목대라는 설이 있다.
정상에는 고종(高宗)의 친필인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 비문이 있다
4. 전주 풍남문
보물 제308호. 1층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지붕은 겹처마를 둔 팔작지붕이다. 전주부성(全州府城)의 4대문 가운데 남문(南門)이다. 1734년(영조 10)에 전주부성을 크게 고쳐 쌓은 전라도관찰사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의 기록에 의하면, 전주부성은 고려 말에 최유경(崔有慶, 1343∼1413)이 쌓았는데, 1734년에 고쳐 쌓을 때, 남문에는 3층 문루(門樓)를 세워 명견루(明見樓)라 부르고, 동·서·북문은 2층으로 건립하고서 각각 판동문(判東門)·상서문(相西門)·중차문(中車門)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1767년(영조 43)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남문과 서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9월에 부임한 전라도관찰사 홍낙인(洪樂仁, 1729∼1777)이 새로 건립하고는 풍남문과 패서문이라고 이름지었다. 당시 홍낙인은 한나라 고조의 향리(鄕里) 이름인 ‘풍패(豊沛)’를 따서 풍남문이라고 지었다고 풍남문상량문(上樑文)에 기록되어 있다. 원래 풍남문 좌우에는 포루(砲樓)와 종각(鐘閣)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1980년에 정비공사를 하면서 옹성(甕城)과 함께 복원하였다.
성문의 가운데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는 2층의 문루가 있다. 성벽은 아랫부분부터 네모반듯하게 다듬은 큰 화강암을 여러 층으로 차분하게 쌓아 올렸으며, 홍예문 정상부분에는 마감돌을 얹어 특이하다. 문루 주변에는 벽돌로 여장(女墻)을 쌓아 둘렀는데, 좌우 양쪽에는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우고서 문짝을 단 일각문(一角門)을 협문(夾門)으로 두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하였다.
문루의 1층과 2층은 평면이 다르고, 규모 또한 갑자기 줄어들었는데, 이것은 원래 3층 구조로 설계되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곧 1층에는 앞뒤로 각각 4개의 고주(高柱)를 세웠는데, 이것은 2층까지 그대로 이어져 2층의 모서리 기둥이 되었으므로, 2층의 너비는 갑자기 줄어든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가구(架構)는 다른 문루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방식이다. 1층 안에는 나무로 만든 계단을 놓아 2층으로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반자가 없는 연등천장[椽背天障]이며, 각 기둥 사이에는 판문(板門)이 달려 있다.
문루의 각 기둥 윗부분에는 창방(昌枋)만 돌리고서 주심포(柱心包) 건물처럼 공포(栱包)를 올렸다. 기둥 위에 올린 쇠서는 다포(多包)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앙서(仰舌)와 수서(垂舌)의 모습인데, 앙서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이 새겨져 있다.1층 앞뒷면의 가운데칸 기둥 위에는 용의 머리를 새긴 초공(草栱)을 바깥으로 뻗도록 놓았는데, 귀기둥 위에 얹은 공포인 귀포에도 살미인 귀한대(限大)에 용머리 조각을 두었다. 첨차(檐遮)는 덩굴풀무늬[唐草文]를 조각한 ‘쌍S’자형 첨차와 함께 끝부분을 둥글게 깎아낸 교두형(翹頭形) 첨차를 섞어서 설치하였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는 도깨비 얼굴[鬼面]·꽃병·짐승상[獸像] 등의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각된 화반(花盤)이 올려져 있다. 이처럼 공포에는 조선 후기의 건물에 나타난 복잡한 조각이나 기교, 재치 등이 엿보인다.
문루 2층의 남쪽면에는 ‘풍남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북쪽면에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풍남문’ 글씨는 1842년(헌종 8)에 전라도관찰사 서기순(徐箕淳, 1791∼1854)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출처 한국문화대백과사전
5. 전주 한벽당
한벽당(寒碧堂)
찰한, 푸를벽 - 차고 푸르도록 맑은 전주천을 내려다 보는 승암산 기슭 발산머리의 절벽을 깎은 자리에 세운 누각이 한벽당(寒碧堂)이다. 한벽은 벽옥한류(碧玉寒流)를 뜻하는 것으로 바로 정자 밑을 흐르는 전주천의 물이 시리도록 차고 푸른 기운을 발한다고 해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옛 사람들은 한벽청연이라 하였고 전주 8경의 하나로 꼽는다.
한벽청연(寒碧晴烟)은 내가 갠 맑고 청아한 한벽당의 풍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의 개국을 도운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 선생이 태조 8년(1404)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이다.
월당 선생 유허비에는 ‘월당루’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며 ‘한벽당’이라고 명칭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한벽’이란 이름은 이곳이 옥처럼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쳐 흩어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 같다하여 붙인 것이다.
6. 전주천주교성지
천주교 순교성지 ''치명자산'' - 동정부부가 묻혀계신 치명자산 성지
이 산은 옛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산으로 더많이 불려지고 있다.
이 산에는 1784(정조 8년)년 호남에 처음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영입과 서양 선진 문화 수용을 하다가 국사범으로 처형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처 신희, 동정부부로 순교한 큰 아들 유중철(요한),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둘째아들 유문철(요한),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마태오)일곱분이 하나의 유택에 모셔져 있다.
이분들은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 여에 걸쳐 전주 남문밖(현 전동성당),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 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체를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땅에 묻히지 못하고들 건너 재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 되었다.
그 후 1914년 4월 19일 전동 성당 보두네신부와 신도들이 이 산정에 모셨다.
선인들이 해발 300미터의 산정에 님들을 모신 뜻은 세계교회가 ‘진주중의 진주’라고 찬탄하는 동정부부순교자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행, 그리고 숭고한 순교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 님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지방 기념물 제 68호로 지정된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님들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4년 5월 9일 건립된 기념 성당이 있고, 그 아래 왼편에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오른편에는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되어있다. 순교신앙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산은 진리의 뜻을 세운 사람과
순교자들을 흠모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며, 기도 공원으로 사랑 받는 한국의 몽마르뜨르(순교자산)이다.
# 전주의 축제
1. 비빕밥축제
2. 전주 국제 영화제 (영화의 거리 조성)
3. 전주 한지문화축제
4. 전주서계소리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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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228-5203 (010-5879-5204) 드림진로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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